내가 좋아하는 것.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
그걸 토대로 조금씩 기워 나가는 것.
그러니 나와 뜨개질의 관계는
가히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지금 트렌드가 크로쉐라서
이런 포스팅을 하는 거 ... 맞음.
그런데 159년만에
금환일식과 개기일식이 동시에 일어났던 어느 밤처럼
나의 취향이 드물게 트렌드가 되는 날이 온 것도? 맞음. 흑흑.
예쁘다고 생각한 크로쉐 현실 착장.
청청한 데님 상의랑 패턴 프린트 하의,
그 위에 끼얹은 크로쉐 가방은 쿨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저 바구니에 있는 가방보다 더.
아마 크로쉐 패턴의 명채도가 낮은 게 한몫하는 듯.
크로쉐 아이템에는
보이지 않는 아슬아슬한 경계가 있다.
그걸 잘못 넘으면 갑자기 시골길로 들어서게 된다.
혹은 블랑켓을 잘못 뒤집어 쓴 것처럼 느껴지거나.
어쩌면 크로쉐에게 허용 가능한 면적이란
저 정도가 마지노선일까? 잠깐 생각했다.
그런데.
이 가디건을 봤다.
예쁜데 ? 모지? 싶었다.
어디 제품이지? Bode인가? 싶었는데?
zara라고 한다.
공홈을 뒤졌더니 같은 제품은 찾을 수가 없네.그런데 꽤나 많은 크로쉐 아이템을 찾을 수 있었다.특히 맨즈웨어.
지금껏 살다보니 이런 저런 일이 있었는데
남자가 크로쉐 가디건 입는 시대가 올 줄은 몰랐다 진짜.
요새 티비를 틀면
모든 아름다운 남자들이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다.
난 흡족해.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리고 태초에 엠마 가디건이 있었다.
잔상처럼 어른거리던 엠마 가디건.
사진을 보니 역시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다.
진주 반지도 하고 있다.
크로쉐랑 진주를 매치하는 것.
몇 년전만 해도 할미템이라고 치부되었을 이 아이템들의 조합이
쿨하고 힙하게 재해석되는 게 반갑고 좋다.
사실 우리 할미 할비들이야말로
리얼웨이 패션의 귀재요,
세상에서 제일 쿨하고 흥미로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엠마가 입은 것은 Bode가 맞았다!
최근 제일 쿨하고 힙하고 예쁘고
좋은 거 다 하는 Bode('보디'로 읽음)는
여성 디자이너인 에밀리 보디(Emily Adams Bode)가 만든
뉴욕을 근간으로 하는 브랜드다.
그는 여성 최초로
뉴욕패션위크 맨즈에서 쇼를 연 사람이고
어린시절부터 가족과 함께 갔던 빈티지 마켓에서 발견한 원단들,
희소한 빈티지 원단을 수집해 컬렉션을 제작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에 현재를 덧대는 방식이다.
옷을 통해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연결되길 바란다며.
늘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브랜드의 배경 스토리나 디자이너에 대해 몰랐을 때도
이미 나는 이 브랜드에 정서적으로 교감하고 있었다.
진부하다고 여겨지기 쉬운 자수, 패치워크, 퀼트, 뜨개 같은
다분히 '여성적이고', 공예적인 요소들을
여성복이 아닌 남성복에 적극 활용한 것부터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디자인은 그 자체로 재해석이고 솔기 하나로 경계를 넘는 것이다.
그리고 방금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인데,
해리 스타일스가 보디를 자주 입는다고.
해리는 보디를 좋아하고
나는 해리와 보디를 좋아하는군요!
어쩌면 이렇게 멜랑콜리하고 섬세하여
향수에 젖게 만들면서도 (유럽 빈티지 마켓 가짜 기억 생성)
동시에 모던할 수 있는 걸까.
춥고 어두운 계절처럼 형태와 색을 절제하는 옷만 보다가
Bode 컬렉션을 보면 더 해,
섞으라고,
더 다채로워지라고
니가 누구든 그래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아
어쩐지 속이 시원해진다.
계속되고 있는 미니멀리즘 라이프 스타일의 강세로
내가 질질 끌어온 모든 옷들을 정리되지 못한 미련으로 느끼게 하고
아직도 버리지 못한, 앞으로도 입지 않을 할머니가 떠준 스웨터 같은 것이
그저 한정된 부동산을 차지하고 있는 짐짝처럼 느껴졌던 시간들에 대한
반격을 대신 해준달까.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옷에, 기억은 쌓이는 거라고.
우린 거기서부터 나아가는 거라고.
Bode의 옷들이 옷에 대해 재고하게 해주었다.
올 여름, 물론 Bode 스웨터는 살 수 없겠지만.
자라에서 크로쉐 니트를 구경하고
엄마 옷장을 뒤져 비슷한 걸 찾아내면 어떨까.
그 위에 케케묵은 린넨 셔츠를 걸쳐 보는 것으로
보디의 정신을 입으면 어떨까.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조합해 나갈지, 그걸 골몰하는 동안
꿉꿉한 장마가 지나고
여름의 극성이 좀 누그러져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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