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몰한 모기는 반드시 죽여야 잠을 잘 수 있는 나.
헛스윙으로 한 번 놓친 모기를 기어코 잡겠다고
졸린 눈을 부릅뜨고 잠복근무(?)를 하다보니
계획에 없던 '탈혼기' 완독해버린 어젯밤.
사실 감상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다 읽고 나니까 뭐라 해야하지.
기대하지 않았던 편지를 받은 느낌이랄까.
오늘 아침 눈 떴을 때도 그런 느낌이 남아 있어서
그래서 감상을 몇 자 써둔다.
유혜담 작가의 <탈혼기>는
일목요연하게 간추려 요약하면
그만 조서가 되어버리는 인생의 굵직한 사건과 그 여파를
할수 있는 한 지나치게 자세히 씀으로써
사건을 일종의 기행(여행)으로, 장르 탈주를 시도한 책이다.
자신이 경험한 어딘가(혹은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게 된 경위이고,
그 경위를 적어 내려가는 형식 또한 탈주에 가깝게 구성했다.
으레 있기 마련인 정해진 이야기의 순서를 지키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는 불행의 클리셰를 반복하여
나의 경험을 나의 고유한 경험으로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자꾸 처음으로, 맨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아마 여기 적힌 글들은 시간 순서대로 점을 찍어 연결한다면
지그재그 모양으로 엮이는 형태가 될 것이다.
이 방식을 통해 '탈혼기'는 무엇을 얻었냐? '썰'에서 벗어난다.
'썰'이라는 짙은 토로와 고발, 진흙탕 싸움의 냄새,
익숙한 불행의 기승전결로부터 살짝 각도를 튼다.
'썰'은 아슬아슬하다.
거기에는 너무 많은 거품이 껴 있고
말하는 사람과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
그리고 듣는 사람 모두를 어느 순간 폭삭 주저 앉기 좋다.
이 책과 요새 나오는 에세이들과의 차별점이라면
단연 한 챕터당 분량이 꽤 많다는 점일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비유지만 작가의 폐활량이 믿음직스러웠다.
동시에 이렇게 많은 말이 나오는 몸에 대해,
어떤 압력이 이 몸을, 이 삶을 누르고 있었던 걸까 생각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압력밥솥의 내부 같은 걸 생각했다.
작가는 현재 위치에 도달하기까지
어디로부터 출발해서 어디에 도착했는지를 쓰고 있다.
누군가에게 그저 말로 전달하려면
어쩔 수 없이 요약을 하는 과정에서 잘려 나가고 삭제되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진짜 이야기는 그 지워진 것들 속에 침잠해 있음을 아는 사람이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어렴풋이 알았던 것,
나중에는 그 상쾌하지 않은 뒷맛의 근원이 무엇인지
끈질기게 끝까지 쫓아가 복원해내려한 흔적이 보였고
바닥까지 내려가서 쓴 글들이라 처절했고
그 과정에서 내게 전달되는 그의 감정 면면이 꽤나 처참했음에도
끝내 의젓해서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다.
아팠던 일과 아팠던 일에 대해 쓰는 것은 정말 다른 경험이다.
좀 맥락에서 벗어난 얘긴데
우월과 열등, 오만과 자기불신은 어쩌면 그렇게 한몸일까.
그 양 극단을 오가면서 '나'를 '나'에 근접해 가는 것.
'내가 느끼는 나'를 조정해 나가는 것이 삶일지 모르겠다.
1. 언젠가 겪었던 일을 글로 쓰고
2. 그걸 쓰면서 그걸 다시 겪어내는 것.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이런 게 아닐까.
이게 부활이 아니라면 무엇이 부활일까.
이게 여행이 아니라면 무엇이 여행일까.
'나'라는 지난한 진창에서 출발한 여정은
뜻밖에도(사실 안 뜻밖) '우리'라는 발할라 궁전에서 끝난다.
이 책 맨 첫 장에 써 있던 문장, '책 한 권이 필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그 때 다시 내게 도착했다. 그런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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