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비

코로나 이래 마신 원두 중간 결산: 난 시대의 것이 아닌 너의 것

조구만 호랑 2021. 12. 13. 21:04

커피를 쏟지 않고 내 방까지 들고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주 가끔 두유 개거품 모자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어? 스파이가 있네요. 스프가 맛있어지는 계절.

 

 

 

오후.

커피와 함께 호시노겐의 '시시함 속에서'를 듣는다. 

 

 

https://youtu.be/DCwynUEaHuw

호시노겐 선생님 보면 이제 아베한테 짜증냈던 것부터 떠오름. 아 짜증은 아니고요. 불편한 기색.ㅎ

 

 

이 노래에 그런 가사가 나온다. 

僕は時代のものじゃなくて 난 시대의 것이 아니고

あなたのものになりたいんだ 너의 것이고 싶어.

 

바로 앞 문장은 이것이다.  

流行に呑まれ人は進む 周りに呑まれ街はゆく 유행을 받아들이며 사람은 나아가고

 周りに呑まれ街はゆく주위를 받아들이며 세상은 돌아가지.

 

僕は時代のものじゃなくて 난 시대의 것이 아니고 

あなたのものになりたいんだ 너의 것이고 싶어.

 

이 두 문장 때문에 이 노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물론 목덜미에서 빵냄새 난다는 가사도 좋아함.)

나는 시대의 것이 아닌 너의 것이 되고 싶어. 이런 세상에서. 

모든 것이 교환되고 대체되는 이런 세상에서

감히 유일한 것이 되고 싶다고

그런 소속을 가지고 싶다고.

 

사랑과 혁명.

둘 사이에는 시시한 것이 있나보다. 

 

종종 생각한다.

소비를 관두고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없어)

유행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정갈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없어)

그렇게 되기에 나는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도 마음의 안식처를 좀 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그래야 되지 않을까요. 

 

모든 것이 내 주위를 잡아 끌고,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는 데도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가져야 하는데.  

돈을 냈다고 모든 소비가 정당해지는 건 아니란 걸 알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착취에 가담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짜증이 치솟고,   

그저 많이 벌고 많이 쓰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세상에 싫증이 났다가,

 

실은 그런 세상은 없고, 그저 그걸 제일 바라는 게 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끊임없이 무언가를 사고 아무말이나 해대는 리뷰를 쓰고

그러다 보면 어떤 일이 생기냐면  

나 자신을 덜 좋아하게 되는 것 같다.

나 자신을 자꾸 다른 무언가에 의탁하고 싶어진다. 

 

아까는 아이묭에 관한 인터뷰 글을 읽다가 '시대를 즐기세요'라는 문장을 봤는데 

그래, 두 개의 길이 있는 것이겠지, 생각했다.

거슬러 오르는 방법도 있을 테고.

어쩌면 그 방법이 유일하게 보일 때가 있다.  

 

왜냐하면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유행에 민감할 필요가 없는 삶, 모든 SNS를 끊고 면벽수행 하는 삶, 

자잘한 소비를 컷팅하고도 유지되는 삶이야말로 이미 축적된 자원이 풍부한 삶, 

그것이야말로 (다양한 의미의) 귀족적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노비의 삶은 어떻겠나요. 정답: 번민이 무지 많다.

 

어쩌면 나는 그 말을 하고 싶어 이렇게 서두가 길었나보다,

그 모든 번민들이 나로 하여금

커피를, 더 많은 커피를 소비하게 했다는 그 말을 하려고. 

하루에 한 번은 정확하게 구분되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커피를 마시고 있다.

오후니까 로스터릭에서 산 콜롬비아 디카페인을 내렸다. 

 

얼마 전부터 원두에 관해서 포스팅을 해볼까 하고 고심하고 있었는데  

그간 모아둔 원두 봉투들을 오늘 꺼내서 펼쳐 보고 좀 놀랐다. 

나는 커피를 정말로

많이

마셨구나. 내 피는 커피라고.

다음 봉투들은 2020년 2월부터 모은 것이다. 

 

 

부산의 모모스 커피.

모모스 커피 원두 봉투들. (2020. 2. 25~ 12.14)

 

https://momos.co.kr/index.html

 

모모스커피 Specialty for All

산지 직거래 스페셜티 커피의 대표 브랜드

momos.co.kr

 

모모스 커피는 주문 기록이 2020년 2월 25일부터 12월 14일까지로 되어 있다.  

500그램 10개. 200그램 4개. 도합 5800그램, 5.8kg. 

 

모모스 커피 홈페이지에서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위클리 마켓은 정말로 유용했다.

모모스 커피 측에서 내놓는 원두 500그램을 저렴한 가격에, 고를 필요도 없이, 그냥 사면 되니까 편했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원두 원산지, 맛에 대한 편견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원두를 접할 수 있었다.

원두를 다양하게 시도해 보고 싶고 그럼에도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분에게 강력 추천. 

다만, 일주일 정도 주문을 모았다가 수요일에 발송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간혹 원두를 빨리 소진하거나 하면

마음이 초조해지는 일이 생기곤 했던 것 같다. 많이 마시는 사람은 이게 안 좋다. 예산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가장 마지막에 마신 시그니처 블랜드 부산의 인상이 좋았다.

주변에 선물하기도 하고 가장 환호하면서 마신 원두는 프루티 봉봉인 것 같다.

가볍고 화사하고 청량한 맛이라 여름에 아이스로 마시기 좋았다.

산미를 질겁한다면 역시 에스 쇼콜라부터 마셔 보세요.

 

봉투를 다 모아 놓고 보니 봉투의 아트웍이 무척 아름다운 것 같네. 

 

 

한편, 로스터릭.

로스터릭 원두 봉투들. (2021년~ 오늘까지)

 

https://smartstore.naver.com/rick

 

로스터릭 : 네이버쇼핑 스마트스토어

Rick 의 원두상점

smartstore.naver.com

 

 

로스터릭 원두는 2021년에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모모스 원두에서 로스터릭으로 옮겨온 것은 

네이버가 네이버페이를 미친듯이 홍보하기 시작하면서

그 흐름에 내가 네이버 생태계에 주저 앉은 흔적이기도 하지만 

주문 받은 그 날 로스팅해서 보내주는 로스터릭 원두가 훌륭한 탓도 있었다.

그리고 말이 안 되게 저렴하다.  

며칠 전인 12월 4일부터 약간의 가격 상승이 있긴 했지만 

500그램 블랜드 원두(DG)를 8250원에 살 수 있었는데 심지어 맛있다. (지금 찾아보니 9900원이네요.)

아니 맛있는데 싸다는 흐름이 맞겠네요. 

이것저것 도전해 보면서 500그램 10개. 200그램 4개. 총 5800그램, 5.8kg을 비웠다. 

20그램짜리는 서비스로 주신 것들인데 이것도 다음 원두 선택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던 것 같다. 

 

 

이번에는 원두 설명을 금색 집게로 찝어서 보내심. 집게 돌려 드리고 싶다. 원두 설명과 로스팅 날짜가 적혀 있는 게 생각보다 중요한 셀링 포인트인 듯.

 

요즘 마시고 있는 것도 같이 찍어 봤다.

주로 핸드드립해서 물을 아주 조금 타서 마신다. 

이렇게 마시다가 어디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마시면 그게 또 별미야. 기름진 맛. 

DG 원두는 다크하고 고소한 맛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것부터 마시고 시작한다.

신맛이 싫은 분에게 추천하고 싶고, 나는 주로 드립으로 마시지만 모카포트로 추출해도 맛있다.

이게 문제의 500그램에 8250원이었던 원두임.

온두라스 원두는 온두라스에서 여성 대통령이 당선됐길래 함 주문해봤다. 별 생각 없이 산다. 

콜롬비아 디카페인 <- 이번에 마시면서 얘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정말 맛있다. 카페인 취약 계층도 이 원두를 드셔 보세요. 동생이 식으면 더 달고 맛있다고 함. 저는 딱히 단맛을 느끼진 않았는데 첫 모금에 너무 맛있어서 아침부터 이것만 마시다가 결국 하루 카페인 분량을 못 채워서 헤롱대다가 저녁에 선잠을 자고 만 날도 있었다. 

 

 

 

일디오 커피 로스터스 

일디오. 몇 번 주문해서 마셨다. 900그램.

https://1do.co.kr

 

일디오 원두커피

CS CENTER 1811-8624 월-금 9:00-13:00, 14:00-18:00 * 점심시간 13:00-14:00 * 토/일/공휴일 휴무

1do.co.kr

 

여기는 500그램에 15000~16000원. 신선하고 괜찮았다.  

다만 포장이랑 패키지 전반이 좀 별로라고 느꼈는데 지금은 바뀐 거 같아 방금 물개 박수 쳤다. 

다시 주문해서 마셔 보고 싶은 곳. 

 

중간 중간 주문을 잊어버려서 카페인 미주입 응급 상황 되거나,

남아 있는 원두가 있으나 지루해졌거나, 선물 받거나 해서 마신 원두들은 다음과 같다.  

 

피콕 원두 2kg. 라바짜 원두 1kg. 투썸 200그램. 정글 로스터 200그램. 일본 토카토 원두 200그램. 총 3600그램. 3.6kg.
라바짜 원두. 생각보다 기골이 장대하셨다.

 

딱히 신선함을 기대하지 않고 샀던 라바짜 원두는 한창 모카포트에 빠져 있을 때 구매했다.

명성답게 맛이 좋았는가? 그건 잘 모르겠다. 모카포트와의 궁합은 좋았던 것 같다.

1kg 짜리를 사고 마음이 든든했던 게 제일 컸다. 에스프레소로 마시기. 

 

주로 드립해서 마시고 있지만 에스프레소 추출해서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호로록. 카페인을 연료로 쓸 때. 

 

강렬한 빨강. 작아 보이지만 200그램이네요.

 

일본 토카도 원두는 선물 받은 것인데, 정말로 다크한 맛을 내뿜었다.

선물한 친구도 킷사의 느낌이 난다며.  과연.

그러고 보니 요즘 너무 킷사에 가고 싶다. 일본 말고 킷사.

서울 말고 광화문. 이런 소망도 가능한가.

물 대신 얼음 세 개 넣어서 아메리카노로 마시면 식후에 깔끔하게 어울린다.  

우유를 조금 첨가하거나 앵무새 설탕을 넣거나 하면 더 맛있어질 게 분명했지만

우유나 설탕 넣은 커피를 마시지 않아서 시도하진 않았다.

 

뜨거운 거 마시다 차가운 거 마시다 하기. 토카도 원두는 당시 득템한 에이스와 어울렸다.  

 

그밖의 원두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는데, 할말이 없기 때문이다.

피콕 원두는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홀빈을 팔아서 좋았고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써보니 생활인에게는 커다란 장점들뿐이네. 

작은 단점 하나. 금방 질려서 꾸역꾸역 비웠던 것 같다.

500그램을 사면 좋았을 것. 

 

 

루트 커피 & 커피 장인 

왼) 루트 커피 오)커피 장인. 이 두 원두는 집 근처에서 샀다. 200+500 총 700그램.

 

왼쪽. 경북대 근처, 루-트. 원두는 맛있게 마셨던 것 같은데

원두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인상을 받아 재구매까지 이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야속하다. 잘 팔리는 건 늘 잘 팔린다. 잘 팔리기 때문이다. 

유명한 사람은 유명하다. 유명한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오른쪽. 경북대 근처 커피 장인. 무척 맛있게 마셨다. 

그런데 평소에 마시던 원두가 배송 직전에 중배~약배로 로스팅한 것이었어서

커피 장인 원두가 상대적으로 많이 볶은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샀을 때 이미 기름이 돌기 시작해서 얼른 소진해야 하는 압박감이 있었음. 그리고 가격...

절대 비싼 편이 아닌데 워낙 저렴하게 구입한 원두를 먹다보니 상대적으로 비싸게 느껴졌다.

500그램 할인폭이 크지 않았다.  

그치만 기회가 된다면 또 사서 마시고 싶을만큼 맛은 좋았다.    

 

~결론~

나는 2020년과 2021년에 총 몇 킬로그램의 원두를 마셨는가. 

마시고 버린 봉투는 제외하고. 

도합 16.8kg의 원두를 마셨다. 16,800g.  

나의 세 고양이 친구들의 몸무게를 모두 더한 값에 비등하고, (털 쪄서 고양이쪽이 살짝 더 나감^^)

200그램 원두로 환산하면 84봉지.

2년을 대략 730일로 계산하면 정확히 하루에 23그램의 원두를 소비한 셈인데 

내가 한 번에 내리는 원두의 양과 얼추 비슷한 것 같다. 

코로나 2년차, 그동안 때로 엉망인 날도 있었지만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한 잔의 커피만큼은 마셨다는 결론.

그게 시시함 속에서 내가 찾은 사랑인 것 같다.  

 

그리고 행여나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 사향 고양이로는 태어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