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패드 프로 11인치에 프로용 매직 키보드를 물려서 다니곤 한다.
문제는 이 둘을 합한 무게가 왠만한 랩탑 무게라는 것이다.
이걸 어깨에 지고 다닌 다음날은 어깨랑 목이 너무 아팠다.
그러다 문득,
손잡이가 달린 파우치를 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검색을 하기 시작했는데
정말로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뭐랄까, 손잡이가 달린 아이패드 파우치는 두 종류로 나뉘는 것 같았다.
전면에 귀여운 곰, 토끼, 호랑이 같은 게 붙어 있거나,
예전에 대학생일 때 행정실에서 빌린 노트북 가방이거나.
그런 극단적인 두 종류의 파우치들만 끊임없이 나오다가 가끔 마음에 든다 싶으면 그건 손잡이가 없는 클러치 형태였다.
차라리 토트백을 사자는 결론에 도달하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백팩을 활용하는 것인데,
아이패드를 넣어 다니자고 백팩을 메는 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렇게 11월부터 아이패드 프로용 토트백을 찾는 모험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나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손잡이가 짧을 것.
2. 가로폭은 25cm 이상, 세로폭은 20cm정도.
3. 힘 있고 질긴 소재이면서 가벼울 것.
4. 패딩 안감, 혹은 완충력이 있으면 좋다. (이 요건은 충족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이패드 프로 11인치의 사이즈는 다음과 같았다.
(mm)
가로 178.5
세로 247.6
두께 5.9
그렇게 모든 조건을 아우르자, 그 때부터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은
가로 25 세로 20, 숏핸들, 24수 메이드인usa 코튼의 헤비 캔버스 토트백이었다.
처음에는 마츠노야의 헤비 캔버스 토트백에 마음이 갔다.
오카야마현의 두꺼운 범포천으로 만들었다는, 장인이 만들었다는 그 가방.
근데 정신을 좀 차리고 보니 사실 이건 그저 오랜 위시리스트에 있는 아이템일 뿐,
데일리로, 아이패드용으로 가지고 다니기에 다소 무거운데다
오버스펙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작 1-2km 반경에 나가면서 공구가방을 가져갈 순 없는 노릇.
과감히 마츠노야 캔버스백을 선택지에서 지웠다.
그러다 뒤늦게 일명 신라호텔 베이커리백을 알게 되었는데,
스몰 사이즈가 아이패드용으로 알맞다는 후기를 읽고 좀 관심이 갔다.
근데 왜 스몰 사이즈가 미디엄 사이즈보다 비싼 것이며,
리셀가 대체 무엇 ... 그리고 그 곰은 대체 무엇.
왜 서울곰은 브라운이고, 제주곰은 버건디이며
서울곰의 손발은 움직이고 제주곰의 손발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인가.
혼자 뒤늦게 궁금한 게 많았다. 어쨌든 이제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은 패스.
그러다 파타고니아 토트를 찾았는데,
이건 소재에서 탈락, 핸들 부분도 길고 얇았다.
그러다 템베아, 단톤, 오르치발을 거치고 거쳐
결국 토트백의 맥도날드. 랜드스앤드와 엘엘빈 토트에 도착했다.
결국 기본으로 오려고 이렇게 ...
언젠가 <헤비듀티>라는 책에서 본, 헤비듀티의 원류인 미국 브랜드들.
여기서 '헤비듀티'라는 말의 뜻은 노동에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노동을 견뎌내고 야외활동을 견뎌내는 물건들.
나는 감도가 높고 세련된 감성이 농축된, 특별한 날, 특별한 사람을 타겟으로 한 물건들보다
프론티어 정신을 가지고 만들어져 명맥을 이어온, 이제 할아버지가 된 브랜드가 내놓는 투박한 물건들이 좋다.
실생활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현실에 발붙인 보통 사람들이 쓰는 실용적인 물건들의 만듦새에 마음이 간다.
아마 내가 세련된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https://www.beams.co.jp/news/2782/
아까도 위의 빔즈플러스에서 엘엘빈과 콜라보한 토트들이 귀여워서 둘러 보다가 또 그런 생각을 했다.
앙증맞은 토트백에 십오만원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저 초록과 파랑 토트에 마음을 빼앗기는 동시에 엘엘빈 공홈에 있는 기본 토트백으로 마음이 급 기울었다.
오래 전에 얼음을 나르는 용도로 만들어졌다는, 보이는 곳에 로고 하나 없는 질긴 캔버스백 말이다.
하여튼 나는 이제 물건을 모시는 기분을 느끼며 살고 싶지 않고 그런 에너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신기한 건 빔즈플러스의 엘엘빈 콜라보 상품 페이지에는 일본인의 다양한 실착샷이 딸려 있었는데
그걸 보는 것만으로 아기자기함? 멋쟁이 파워?는 어느 정도 충전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는 것.
나는 되도록 텅 비어 있고 싶은데,
그래도 여전히 내 곁의 베프는 패션에 열정이 있어서 시각적인 자극을 주면 좋겠는 그런 걸까.
이건 뭔가 정당하지 않은데 말이야...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내게는 두 개의 선택지만이 남아 있었다.
랜드스앤드냐 엘엔빈의 문제냐.
펩시냐 코카콜라냐.
일단 펩시는, 아니 랜드스앤드는 저렴하다. 게다가 지금 세일중.
랜드스앤드의 토트백은 내부 공간이 나뉘어져 있고 포켓이 달려 있어 쓰임새가 좋은 듯하다.
또, 컬러가 다양하고 토트 종류 자체가 훨씬 다양하다. 가드닝백도 구비하고 있어서
장바구니에 한 번 넣고 기분만 내봤다. (이건 세일폭이 작다)
한편, 엘엘빈 토트는 내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한다.
애초에 옵션이 많지 않은 것도, 튼튼하고 투박한 것도 내 취향에 훨씬 가깝다.
그러나 지퍼 옵션은 비교적 가격대가 있는 편이고
공홈에서 컬러의 선택폭이 크지 않다. (원하는 컬러 품절 사태)
그래서 제 결정은요 ...
지금 한달이 넘도록 이런 식으로 고민만 하고 있다.
요새 오미크론의 대활약으로 바깥 출입을 멈춘 관계로 가방의 필요성 자체가 희미해진 탓도 있다.
그러나 새해가 시작 되자마자 다시 드릉드릉하는 물욕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이걸 쓰면서 생각이 정리될까 기대를 좀 했는데 여전히 나는 답이 없다.
이 글을 끝내고 운동을 하러 갈 계획이었는데,
아마 운동을 하기 싫어서 글을 길게 길게 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아마도 나는 무엇을 선택해서 매듭을 지었을 때의 기쁨보다
선택을 미루면서 얻게 되는 가능성들,
거기서 오는 즐거움이 더 큰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내가 아주 가끔 말이 안 되는 충동적인 소비를 할 때,
그 때 느끼는 기쁨이 얼마나 크고 확실할 지 상상이 되십니까. ㅎㅎ
나는 아마 한동안 더 고민을 하다가, 결국 엘엘빈 직구를 시도하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은 더 많은 선택지를 꼽아 보며 이 여정을 즐기리라.
끝으로 인상적이었던 엘엘빈 사진을 첨부한다.
랩탑과 파인애플이, 식료품과 장화가, 담요와 꽃이 담기는 가방.
마치 일상에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일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어떤 사물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을 뻗어 나가게 한다.
동시에 가방의 실용성 그 자체, 오염될 것을 겁내지 않고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는 것.
그런 범용성이 무척 마음에 든다.
* 근데 엘엘빈에서 갑자기 트럼프가 나와.
뭔지 궁금해져서 대충 봤는데 2017년에 엘엘빈 상속인이 개인적으로 트럼프 선거 캠프에 도네이션 냈었나봄. (육만달러=7천만원)
근데 트럼프가 갑자기 트위터로 엘엘빈 고맙네 늬들 엘엘빈 많이들 사~ 이래버려가지고
민주당 지지자들이 엘엘빈 불매각 세우고 ... 엘엘빈 사측은 회사가 지지한 거 아니라고,
우리 보이콧 하지마... 미워하지마... 읍소했다는 뭐 대충 그런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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