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비

홍상수 감독의 27번째 영화 <소설가의 영화>를 봄 (feat. 헬로톡)

조구만 호랑 2022. 5. 7. 03:05

 

지난주에  <소설가의 영화>를 보고 왔다. 

오전 열시 영화라서 아무래도 혼자 볼 것 같다

는 불길한 예감은 

다행히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50석 남짓이 될까 싶은 작은 영화관,

우리 다섯 명의 관객은

마치 진짜 가족처럼 뿔뿔이 흩어진 채 영화를 봤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

영화 후기를 좀 검색해 봤더니 

상찬하는 글이 많더라고. 

솔직히 나는 러닝타임이 짧아서 좋았다.

반은 농담 반은 진심. 

잠적한 책방 주인과 그를 찾아온 소설가, 

그리고 책방을 도우며 수화를 공부한다는 현수의 대화가  

옹그쌍쓰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의 전부인 것 같았다.

초반에 너무 뱉어 버리니까 그 뒤는 사족인 것 같았고.

 

그는 자신이 지금껏 어떤 강박을 가지고 있었고,

이제 비로소 그 강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그러고 보니

'우연히' 좋은 것들을 만나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 순간 그건 확실히 알겠더라. 

내가 좋아하는 건 바로 그 강박이었다는 거.

그 강박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자연 발생하는 파장들이 ... 웃겼고 ...

 

이 영화도 어쨌든 홍상수 월드에 속하니까 

여전히 배우들은 우연히 어딘가로 간다. 

거기서 그들은 과거에 알던 누군가를  만난다. 

당연하게도 어떤 만남은

풀려고 하면 할수록 꼬이기만 한다. 

그럼에도 그가 건네준 작은 망원경으로

우리는 전에 본 적이 없는 먼 곳을 가까이 당겨 볼 수 있다.
재밌는 건 권해효 배우의 파트너로 등장한 분이

실제 부인이라는 점. 

 

그리고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의 전매 특허인

갑자기 화내기는 이번에도 빛을 발한다.

'카리스마' 소설가의 '뭐가 아깝다는 거냐'는 샤우팅으로  

어리둥절하게 발생한 파국 ㅎㅎ 

급히 떠나는 두 사람 등에 대고 빠른 사과를 하는 소설가의 모습이

정말로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인물 같아 웃겼다. (근데 나만 웃더라)  

홍상수 영화 보다보면 데자뷰 ptsd 옴.

근데 그는 공원 화장실 앞에서 갑자기 영화를 찍겠다며

부조리한 포부를 선언하고 재빠르게 미래를 조망하며

점과 같은 일회성의 만남을 선으로 이으려고 한다.

이 대화가 내내

공원 화장실 앞에서 얼기설기 이뤄지는 게 또 웃겼다.

홍상수식 미장센.

  

가장 인상적이고 또 가장 의문이었던 장면은

두 사람이 '딸기 분식'에서  

비빔밥과 라면을 먹으면서

오늘 이 만남이 얼마나 감격에 겨운지

몇 번이나 반갑다는 말을 반복하더니 

(서점 알바생에게 '안녕하세요' 라고 뒤늦게 말한 것처럼) 

상대방이 자리를 잠깐 떴을 때 

그가 먹다 만 그릇에 내 숟가락을 뻗어

남은 비빔밥을 한술 떠 보는 장면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그리고 유리창에 두 번 나타났던 여자애는?

왜 두 번 나타나냐고. 귀신이냐고.

 

어쨌든 이렇게 허기를 채운 인물들은

홍상수 월드의 또 다른 전매특허,

일기쓰세요~착해요~예뻐요~좋아요~좋아해요~등등을 남발하기 위해 

거나한 술자리로 미끄러지듯 진입해야 하기에 

이에 소설가는 '오늘' 첫 만남이 있었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낮에 몇 번씩이나 반복해 익혔던 수화가 생각나는 대목. 

(그 반복되는 수화 대체 뭐였냐고.)

 

그리고 드디어 벌어지는 술자리.  

이 영화가 전작들과 가장 크게 다른 게 있다면 

아마 초록병이 안 나온 거 아닐까? 

프랑스인들이 저 초록병 대체 뭐냐고, 

뭐길래 사람들이 저것만 마시면

속마음을 얘기하기 시작하냐고 했던 ... 

그 초록병, 소주의 시대는 드디어 막을 내리고 

이제 바야흐로 막걸리의 시대가 열린 것인가? 싶었다.

 

그리고 취해서 잠이 든,

영화 속에서도 배우를 연기하는 김민희 배우는 

자신이 출연한 소설가의 시사회에 참석한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생각해 봤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김민희 배우가 들꽃으로 부케를 만들고

결혼 행진곡을 읊조리고 

어머니인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과

공원과 계단을 거니는 장면들은 

영화 밖 현실을 고려할 때

일정한 의도를 포함한 것으로 읽힐 소지가 다분한데

 

마지막 씬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 영화를 막 보고 나온 

김민희 배우의 다소 당혹스러운 듯한 차가운 얼굴이

나는 그래서 그렇게 좋았던 것 같다.

소설가의 영화는 소설가의 영화일뿐,

그것이 실제 삶을 살아가는 실제 인물을 고스란히 담아내고심지어 만족시키는 귀결은 될 수 없다는 ...

오독의 가능성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얘기인 것 같아서.

 

그리고 이 영화는 김민희 배우가

일행들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엘레베이터를 타는 장면에서 끝나는데

난 좀 궁금했다.

그는 옥상으로 올라갔을까?

아니면 마음을 바꿔 아래층으로 내려갔을까.

타고 온 미니쿠퍼에 시동을 걸고

도예가가 있는 집으로 향했을까.  

 

그런 걸 상상하다 보면 

옥상 구석에서 담배를 피던 소설가의 뒷모습이 

현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신 만의 세계 안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소설가의 영화는 그저 꿈이었을까.

그는 실패한 오독에 만족했을까.

 

꽤나 열정적인 선생님들 

 

영화 보고 온 날,

나는 갓 태어난 아기 수준의 프랑스어로 

헬로톡 라이브에 간단한 일기와 감상을 올렸다. 

그랬더니 여기 프랑스 친구들이

원문이 가루가 되게 고쳐 주었다.

 

헬로톡에 가입한 지 일주일쯤 되었는데. 

누가 나에게 그런 원어민 첨삭의 과정이 

언어 공부에 도움이 되는가? 묻는다면, 

아마 분명 도움이 된다고 대답할 것 같다.   

 

그런데 일주일간 내가 깨달은 것은 

프랑스어로 문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너무 만족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확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것에

아무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또, 프랑스어 사용자들이 한국어로 쓴 문장을  

한국어 사용자들이 첨삭하는 것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맞춤법, 어색한 문장의 수정은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고치지 않는 원문이 그다지 나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근데 자신에 차서 첨삭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한국어 사용자가 쓰는 것과 꼭 같은

매끄러운 문장을

프랑스어 사용자가 써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프랑스어 사용자는

프랑스어 사용자로서 한국어에 접근하고,

그 토대 위에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하는 것 아닐까.

이게 헬로톡 일주일차 나의 생각이다.

 

그런 와중에 내가 포스팅한 <소설가의 영화> 게시물에 

 프랑스인이 르몽드 기사를 인용해주었는데 

꿈보다 해몽이라 여기 적어둔다.  

 

…le film qui « célèbre la beauté des rencontres fortuites,

tout en parlant de l'importance de l'authenticité dans le monde malhonnête du cinéma ».

 

... "우연한 만남의 아름다움을 기념하면서, 

영화의 부정직한 세계에서 진정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