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희망도서는 네 권.
하나도 빠짐없이 흥미진진한 책들이다.
1-2-3-4 순서를 지켜서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1. 언캐니 밸리, 애나 위너
불쾌의 골짜기.
어젯밤에 두 챕터 읽고 잤다.
첨에 픽션이라 생각하며 읽었는데 논픽션이래.
그러다 깨달았다. 세상이 소설에 가까워졌다는 걸.
변화의 핵, 소용돌이에 가까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내가 한참 전에 생산된 사양 낮은 컴퓨터처럼 느껴지는데 사실 그 느낌은 꽤나 정확한 것이다 ...
'애나는 배우려고만 하고 행동하질 않아.' (...) 테크 업계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허락이 아닌 용서를 구하라'라는 명언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 이후로 나는 창업자들로부터 진심 어린 장문의 답신을 몇 통 받았고, 회의실에서 고통스러운 일대일 면담을 진행한 후에야, 내가 이 회사에 남을 수 없다는 결론이 분명해졌다. (...) 내가 가치를 더할 수 있는 업무 영역이 한동안은 필요하지 않다고도 했다. (37-38p)
과연. 애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흥미진진하다.
2.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알라딘 추천 마법사가 추천해준 책인데, 굳이 추천 안 해줘도 표지를 보자마자 알았다. 이 책은 내 취향이다.흐린 눈으로 보면 리시올 출판사가 떠오르는데 출판사는 필로우고, 재밌게 읽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번역가가 번역한 책이라 믿음이 갔다.
동생이 책 무덤 속에서 이 책을 보고 흥미롭다고 들어 올렸다가이 책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법'에는 (당연히) 휴대폰이 포함된다고 했더니 점진적인 백스텝으로 물러났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능력은 이제 자기 계발의 반열에 올라도 좋을 특수한 재능이 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 책은 대차게 망한 미국의 정치 환경과 관심 경제 얘기를 필두로 반문화적 꼬뮌이 망한 얘기가 나오고, 필경사 바틀비 얘기가 나오고, 기술의 매개가 아닌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나는 요즘 2000년도에 출간 되었던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다시 읽고 있다. 소름 끼치게도 <오래된 미래>가 진단했던 근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은 고스란히 현실이 되어 있었다.그렇다면 그런 현실 세계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나는 어떤 태제를 갖추어야 할까 내심 생각이 많았는데 그 해결 실마리를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어느 시점부터 나는 이 책을 자기계발서로 위장한 정치운동 도서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 책이 온전히 그 둘 중 하나이긴 한지 잘 모르겠다. (33p)
관심경제는 우리를 참담한 현실에 계속 붙잡아두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우리가 겪는 고충이 과거에 어떤 형태였는지 인식하는 것뿐 아니라, 어떻게든 실망하거나 타격받지 않고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갈수록 더 중요해지고 있다. (121p)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를 통해 누군가의 소리를 듣고, 누군가를 보고, 우리의 세상에서 누가 행위 주체성을 가질지를 결정한다. 관심은 사랑뿐만 아니라 윤리의 기반을 형성한다. (255p)
이 책 읽고, 비벡 H. 머시의 <우리는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2020, 한국경제신문)>를 읽어도 좋겠다.
3. 개미는 왜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투자하는가?, 김수현
저자 김수현 님의 이력이 굉장히 다이나믹해서 놀랐다.
종교(불교학과) 공부를 하다가 별안간 인류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간호학과에 다니고 있다고.
아마도 이 책은 인류학 석사 논문을 기반으로 쓰여진 책인 것 같다. 저자도 흥미롭고 다루는 제재가 그냥 너무 재밌어 보여서 골랐다.
보통은 책의 앞쪽 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는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슬쩍 보고 마는 편인데
이 책이 지금 이 시기에 나온 것이 여간 예사롭지 않아 보여 저자 소개를 먼저 들춰 보고 말았네요.
인류학적 관점으로 현 한국의 '투자 인류(개미)'를 분석한 글이라니요? 너무 영리하고 비범함.
어떤 현상자체보다 그 현상을 분석한 글을 훨씬 더 흥미로워 하고 좋아하는 나같은 인간이 감사하게 읽을 책. 이 책은 매매방(주식 투자 단체 채팅방)의 대화를 중간 중간에 싣고 그걸 중점으로 현실을 분석하고 주요 사안들을 개진해 나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인지 첨부터 등장할 인물을 소개하고 주식 은어? 신조어? 간략하게 다루며 시작하는데 그냥 첨부터 너무 웃기다... 사실 웃을 일이 아닌데 웃기고 이게 이 책에 잔잔하게 흐르는 톤일 거라는 걸 이 소개글에서부터 직감했다.
4. 페어플레이, 토베 얀손
토베 얀손의 <여름의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동시에 무섭게 아이러니한 여백이 느껴지는 글을 쓰는 작가가 있다니.
토베 얀손과 피카를 할 수 있다면.
그러고 나서 <두 손 가벼운 여행>을 읽는데 이런 문장이 있어서 혼자 터졌다.
작가는 책 속에서 만나야 한다는 건 아름다운 생각이에요 (12p)
나는 이 <두 손 가벼운 여행>의 '편지 교환' 챕터의 문장들이 너무 좋아서 몇 번 선물하기도 했고,
여러 번 옮겨 적기도 했다. 그리고 기록하는 것은 오직 기록과 자기 자신 사이의 문제이므로 다른 사람들한테,
또 그들이 뭐라고 생각하고 이해하는지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죠. 그것만이 옳은 길이에요. (12p) 라는 문장에는
여러 번 빚을 졌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은 책을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됐다. 무민은 그저 하마가 아닌 거야.
그러니까 이 책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이다. 읽지 않아도 이미 사랑하는 게 가능한 책.
'페어플레이'는 두 사람 이상을 필요로 하는 단어이지만
'그림 고쳐 걸기'를 읽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 책의 페어플레이는 최소 욘나와 마리 사이에서,
그리고 욘나와 욘나 자신, 마리와 마리 자신에 대해서도 성립하는 말인 것 같다고.
내버리기는 쉽지 않지. 나도 알아. 하지만 너는 단어를, 한 페이지 전부를, 길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다 삭제해야 해. 그러고 나면 속이 시원하지. 그림 어떤 그림이 벽에 걸릴 권리를 박탈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 거리가 있어야 해. 꼭 필요하지. (...) 스스로 느껴야 해...... 사람의 눈길이 그림으로 덮인 벽을 스칠 때는, 놀라움 같은 무언가가 있어야 해. 너무 쉽게 만들면 안 되지. 숨을 들이쉬고 다시 바라볼 수밖에 없게 해야 하고, 생각을 고쳐먹게 해야 하고, 심지어는 화나게까지 해야 해..... (19p)
그리고 이 챕터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다.
욘나가 줄자를 다시 집으로 가지고 간 다음,
마리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일들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가를 저녁 내내 생각했다. (20p)
단순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자주 숨통을 막아서
천천히 쉬어가며 읽어야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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